시, 글 216

너 살아 있는 그 날까지

널 모른채 살았더라면 네가 내민 손 내가 내민 손 삶의 중간쯤에서 맞 잡을수 없었더라면 내 삶은 참 보잘것 없는 삶이 되었을꺼야 두 눈 속에 눈물이 흐를때에도 가슴 속에 슬픔이 파도를 칠 때에도 네가 있어 나 슬퍼도 웃을수 있었어 네 삶이 되고 싶어 네 삶이 되어 네 가슴속에 심장이 되어 숨쉬고 싶어 내 가슴에 널 안아주고 싶어 내 삶이 단 하루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너를 안고 깨어나지 않을 잠 속에 빠져들고 싶어 널...사랑해 마지막 눈 감는 그 날까지 세상을 향해 소리쳐 들려주고 싶은 그 말을 들려주고 사랑해요... 마지막 숨결 내쉬는 그 날까지 꿈결인 듯 속삭이며 따스한 입김으로 전해주는 그 말을 들으며 네 곁에 잠들고 싶어 나 살아가는 동안 너의 삶을 위해 기도 해주고 싶어 살아가는 이유가 된..

시, 글 2022.03.20

어느 날의 단상 / 이해인

내 삷의 끝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까 밤에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또 한 번 내가 살아 있는 세상! 아침이 열어준 문을 열고 사랑할 준비를 한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승리자가 되어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구하면서 지혜를 청하면서 나는 크게 웃어본다 함께 노래하는 새처럼 가벼워진다

시, 글 2022.03.19

저녁 노을 / 도종환

당신도 저물고 있습니까? 산마루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저녁 해가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뿜어져 나오는 해의 입김이 선홍빛 노을로 번져 가는 광활한 하늘을 봅니다 당신도 물들고 있습니까? 저를 물들이고 고생대의 단층같은 구름의 물결을 물들이고 산을 물들이고 느티나무 잎을 물들이는 게 저무는 해의 손길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구름의 얼굴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처럼 나는 내 시가 당신의 얼굴 한 쪽을 물들이기를 바랬습니다. 나는 내 노래가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당신을 물들이고 사라지는 저녁 노을이기를 내 눈빛이 한 번만 더 당신의 마음을 흔드는 저녁 종소리이길 소망했습니다. 시가 끝나면 곧 어둠이 밀려오고 그러면 그 시는 내 최후의 시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내 시집은 그 때마다 당신을 ..

시, 글 2022.03.16

사는 일이란 / 나태주

아,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잘 보냈구나 저녁 어스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다시 너를 생각한다 오늘도 잘 지냈겠지 생각만으로도 내 가슴은 꽃밭이 되고 너는 제일로 곱고도 예쁜 꽃으로 피어난다 저녁노을이 자전거 바퀴 살에 휘어 감기며 지친 바람이 어깨를 스쳐도 나는 여전히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꿈을 꾸고 내일을 발돋움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 내일도 부디 잘 지내기를 아무 일 없기를 어두워 오는 하늘에도 길가의 나무와 풀에게도 빌어본다 사는 일이란 이렇게 언제나 애달프고 가엾은 것이란다

시, 글 2022.03.14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 김재진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온다던 소식 오지 않고 고지서만 쌓이는 날 배고픈 우체통이 온종일 입 벌리고 빨갛게 서 있는 날 길에 나가 벌 받는 사람처럼 그대를 기다리네 미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까닭 없이 자꾸자꾸 눈물만 흐르는 밤 길에 서서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네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시, 글 2022.03.09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 박라연

누군가의 따뜻함은 흘러가 꽃이 붉어지게 하고 상처는 흘러가 바다를 더 깊고 푸르게 할까 티끌, 이라는 이름부터 피라미 패랭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제 이름을 부르며 어디까지 나아갈까 태평양... 혹은 장미라는 이름으로 계급으로 붐비고 여물어가지만 제 이름의 화력만큼 이글거리는 애간장들에게 가만히 저를 열어 뿌려주는 엔도르핀을 만날 때 어떻게 인사하면 좋을까 사방이 그저 붉게 두근거리며 울어버릴 때 헤어진 이름이 깊고 푸른 바다로 걸어 들어가 버렸을까 내 떨림의 물결 한 가운데서 붉은 해가 떠올랐다

시, 글 2022.03.08

그를 보내며 / 한용운

그는 간다, 그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니요, 내가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간다. 그의 붉은 입술, 흰 이 , 가는 눈썹이 어여쁜 줄만 알았더니, 구름같은 뒷머리, 실버들 같은 허리, 구슬 같은 발꿈치가 보다도 아름답습니다. 걸음이 걸음보다 멀어지더니 보이려다 말고, 말려다 보인다. 사람이 멀어질수록 마음은 가까와지고, 마음이 가까와질수록 사람은 멀어진다 보이는 듯한 것이 그의 흔드는 수건인가 하였더니, 갈매기보다도 적은 쪼각 구름이 난다

시, 글 2022.02.27

봄비 / 조병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온종일 책상에 앉아, 창 밖으로 멀리 비 내리는 바다만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노라면 문득, 거기 떠오르는 당신 생각 희미해져 가는 열굴 그래, 그 동안 안녕하셨나요 실로 먼 옛날 같기만 합니다. 전설의 시대같은 까마득한 먼 시간들 멀리 사라져 가기만 하는 시간들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 그 속에, 당신과 나, 두 점 날이 갈수록 작아져만 갑니다. 이런 아픔, 저런 아픔 아픔속에서도 거듭 아픔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거 이 세상에 왜, 왔는지? 큰 벌을 받고 있는 거지요 꿈이 있어도 꿈대로 살 수 없는 엇갈리는 이 이승 작은 행복이 있어도 오래 간직 할 수 없는 무상한 이 이승의 세계 둥우리를 틀 수 없는 자리 실로 어디로 가는건가 오늘따라 멍하니 창 밖으로 비 내리는 바다를 온종일 내..

시, 글 2022.02.22

누가 묻거든 나 대답하리라 / 이해인

누가 날더러 청춘이 바람이냐고 묻거든 나, 그렇다고 말하리니... 그 누가 나더러 인생도 구름이냐고 묻거든 나, 또한 그렇노라고 답하리라. 왜냐고 묻거든 나, 또 말하리라. 청춘도 한번 왔다 가고 아니 오며 인생 또한 한번 가면 되돌아올 수 없으니 이 어찌 바람이라, 구름이라 말하지 않으리오 오늘 내 몸에 안긴 겨울바람도 내일이면 또 다른 바람이 되어 오늘의 나를 외면하며 스쳐 가리니 지금 나의 머리 위에 무심히 떠가는 저 구름도 내일이면 또 다른 구름이 되어 무량 세상 두둥실 떠가는 것을... 잘난 청춘도 못난 청춘도 스쳐 가는 바람 앞에 머물지 못하며 못난 인생도 저 잘난 인생도 흘러가는 저 구름과 같을진대... 어느 날 세상 스쳐가다가 또 그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가는 생을 두고 무엇이 청춘이고 ..

시, 글 2022.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