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16

하루 내내 비 오는 날 / 백창우

1. 너는 무얼 하는지 이렇게 하루 내내 비 오는 날 너는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언젠가 네가 놓고 간 분홍 우산을 보며 너를 생각한다 조그만 가방 속에 늘 누군가의 시집 한 권을 넣고 다니던 너는 참 맑은 가슴을 가졌지 네가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너무 우중충하고 너를 담아 두기엔 내가 너무 탁하지 몇 시쯤 되었을까 거리엔 하나 둘 등이 켜지고 비는 그치질 않고 2. 너는 무얼 하는지 이렇게 하루 내내 비 오는 날 너는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조동진의 '제비꽃'을 들으며 너를 생각한다 너를 처음 만난 그 겨울엔 눈이 무척이나 많이 내렸지 네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네가 꿈을 꾸기엔 이 세상이 너무 춥고 너를 노래하기엔 내가 너무 탁하지 몇 시쯤 되었을까 수채화같은 창 밖의 세상을 보며 너를 생각한다

시, 글 2022.06.05

기도하세요 / 홍수희

마음이 슬프고 괴로울 때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세요 나보다 더 슬픈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마음의 상처가 짓누를 때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세요 나보다 더 아픈 그를 위해 기도하세요 사는 것이 문득 외로워질 때에 꿈꾸는 일조차 힘겨울 때에 이 세상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세요 깊은 밤 잠 못 이루고 눈물로 지새는 이를 위하여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는 나와 나를 연결해주는 신비로운 끈, 누군가의 온기가 느껴지네요 마음에 한 없이 찬비 내릴 때 두 손을 모아 기도하세요 내 영혼 슬픔은 희미해지고 기쁨이 나를 채울 거에요

시, 글 2022.05.21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 이외수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 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 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

시, 글 2022.05.04

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 이외수

하나 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흐린 세월 속으로 시간이 매몰된다 매몰되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나지막히 울고 있다 잠결에도 들린다 둘 비가 내리면 불면증이 재발한다 오래도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이름일수록 종국에는 더욱 선명한 상처로 남게 된다 비는 서랍 속의 해묵은 일기장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을 적신다 지나간 시간들은 아무리 간절한 그리움으로 되돌아 보아도 소급되지 않는다 시간의 맹점이다 일체의 교신이 두절되고 재회는 무산된다 나는 일기장을 태운다 그러나 일기장을 태워도 그리움까지 소각되지는 않는다 셋 비는 뼈 속을 적신다 뼈저린 그리움 때문에 죽어간 영혼들은 새가 된다 비가 내리는 날은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 새들은 어디에서 날개를 접고 뼈저린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까 넷 비 속에서는 시간이 정..

시, 글 2022.04.26

어디쯤 가고 있을까 / 이정하

내가 원하는 것들은 옆에 있어 주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것들만 내게 몰려들어 그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다 늘 그랬다, 내게 있어 세상은 내게 있어 너마저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가올 실패가 두려워 약간의 여지는 남겨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은 기껏 네가 남겨두고 간 눈물자국이거나 먹다만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들뿐이었다 너 없이도 행복하고 싶었지만 행복할 것이라 마음먹었지만 그럴수록 행복과는 더더욱 멀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찌하여 세월은 나보다 더 빠른 것인가 모든 흘러가는 것들은 머물지 못한다 그러고보면 세상엔 흐르지 않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잡기 위해 이리도 허우적거리는가 지금 난 어디로 가고 있나 어디쯤 가고 있을까

시, 글 2022.04.19

나에게 주는 시 / 류근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 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시, 글 2022.04.16

서러운 봄날 / 나태주

꽃이 피면 어떻게 하나요 또다시 꽃이 피면 나는 어찌하나요 밥을 먹으면서도 눈물이 나고 술을 마시면서도 나는 눈물이 납니다 에그 나 같은 것도 사람이라고 세상에 태어나서 여전히 숨을 쉬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구나 생각하니 내가 불쌍해져서 눈물이 납니다 비틀걸음 멈춰 발 밑을 좀 보아요 앉은뱅이 걸음 무릎걸음으로 어느 새 키 낮은 봄 풀들이 밀려와 초록의 주단방석을 깔려 합니다. 일희일비, 조그만 일에도 기쁘다 말하고 조그만 일에도 슬프다 말하는 세상 그러나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이 많기 마련인 나의 세상 어느 날 밤 늦도록 친구와 술 퍼마시고 집에 돌아와 주정을 하고 아침밥도 얻어먹지 못하고 집을 나와 새소리를 들으며 알게 됩니다 봄마다 이렇게 서러운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아 있는 목숨이라서 그렇다는 것..

시, 글 2022.04.15

먼 길 / 목필균

내가 갈 길 이리 멀 줄 몰랐네 길마다 매복된 아픔이 있어 옹이진 상처로도 가야할 길 가는 길이 어떨지는 물을 수도 없고, 답하지도 않는 녹록지 않는 세상살이 누구나 아득히 먼 길 가네 낯설게 만나는 풍경들 큰 길 벗어나 오솔길도 걷고 물길이 있어 다리 건너고 먼 길 가네 누구라도 먼 길 가네 때로는 낯설게 만나서 때로는 잡았던 손놓고 눈물 흘리네 그리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미소짓기도 하며 그렇게 간다네 누구라도 먼 길 가네 돌아설 수 없는 길 가네

시, 글 2022.04.06

바람결에 스치듯 / 강숙려

꼭 지나가는 구름 같다 흔들흔들 가물가물 흘러가는 구름 같다 오늘은 그리운 것들 많아 울어본 날 있던가 억울한 것들 많아 소리쳐 본 날 있던가 다 부질없어 바람결에 스치듯 훅 날려 보낸다 못내 안타까운 마음 누군들 모르랴 혓바늘 돋는 사연을 내가 네가 하나되어 우리 얼싸안았어도 오늘 이렇게 서러워 오는 까닭엔 정답이 없어 그것이 서러운 그 까닭이다 건들건들 한들한들 바람결에 스치듯 그렇게 보낼 일만이 오늘의 할 일인 것을 비우고 지우는 것만이 살아가는 힘이라 말하고 우리들 풋풋하게 헛웃음 웃는 일

시, 글 2022.03.30

홀로 있는 밤에 / 도종환

이것이 진정 외로움일까 다만 이렇게 고요하다는 것이 다만 이렇게 고요하게 혼자 있다는 것이 흙 위에 다시 돋는 풀을 안고 엎드려 당신을 생각하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홀로 깊이 어두워져가고 있는 다만 이 짧은 순간을 외로움이라 말해도 되는 것일까 눈물조차 조용히 던지고 떠난 당신을 생각하면 진정으로 사랑을 잃고 비어 있는 것은 내가 아닌데 나도 당신으로 인해 이렇게 비어 있다고 내가 외롭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새로 돋는 풀 한 포기보다도 떳떳치 못하고 돌아오는 새들보다 옳게 견디지 못한 채 이것을 고독이라 말해도 되는 걸까 저 길고 긴 허공을 말없이 떨어져 어둔 땅 너머로 빗발들은 소리없이 잠겨가는데 빗방울 만큼도 참아내지 못하면서 겨우 몇 날 몇 해 홀로 길 걷는다고 쓸쓸하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흔들..

시, 글 2022.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