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16

중년의 세월 / 이채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울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느 바람에도 불지 못한 낙엽 한 장 가슴으로 품고 저 노을 따라 홀로 걸어갈 뿐이다 저녁으로 가는 언덕에 서면 가끔은 보석같은 삶에 미안도 하여 다시 보듬어 보는 중년의 세월 나를 지키면서 묵묵히 걸어 온 길이야 저 산 넘고 넘는 구름 같은데 저녁 해는 왜 점점 나를 닮아 가는가 어디선가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 나는 자꾸만 자꾸만 얇아져 가네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 보면 그래도 남아 있는 뽀얀 아침 햇살 봄에도 꽃잎 지던 어느 날엔 더러 눈물이 보이기야 했겠지만 열 두 광주리 햇살에도 녹이지 못할 아픔이 있거들랑 저 노을 뒤로 묻어 두고 갈 일이다 아, 바람은 오늘도 당신을 보내오고 그리움은 언제나 노을로 내리는가 무엇을 꼭 두고 온 듯하여 뒤돌아 ..

시, 글 2022.12.30

겨울 나루터 / 이남일

바람에 실려 왔다가 강물 따라 흘러가는 발자국 소리 보고 싶었소. 꽃잎이 날리던 자리에 눈발이 날리면 그리움은 천길 물속 별빛처럼 박히는데 강물이 얼고 갈대 숲에 함박눈이 쌓이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바라보다가 얼음 강 눈길 위를 끝도 없이 걸었소 강둑을 만나 돌아오는 길에 찍고 온 내 발자국은 왜 이리 낯선지 걷다가 멈추다가 서성이던 모습들이 한 줌 햇볕이면 안개처럼 스러지고 말 육신이 남긴 중력의 흔적들이 강물에 띄울 말 한 마디 담지 못한 채 문득 흰 눈 속에 사라지더이다 계절 따라 만날 것 같던 영혼의 노래여 눈발 날리면 서둘러 떠나는 겨울바람처럼 배 띄우면 물결 따라 닿는 곳에서 그냥 보고 싶었소.

시, 글 2022.12.07

들길을 걸으며 / 나태주

세상에 와 그대를 만난건 내게 얼마나 행운이었나 그대 생각 내게 머물므로 나의 세상은 빛나는 세상이 됩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그대 한 사람 어제는 내 가슴에 별이 된 사람 그대 생각 내게 머물므로 나의 세상은 따뜻한 세상이 됩니다 어제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어제 내 발에 밟힌 풀잎이 오늘 새롭게 일어나 바람에 떨고 있는 걸 나는 봅니다 나는 당신의 발에 밟히면서 새로워지는 풀잎이면 합니다 당신 앞에 여리게 떠는 풀잎이면 합니다.

시, 글 2022.11.18

사랑한다 말 못하고 가을비가 내린다고 말했습니다 / 나태주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꽃이 예쁘다느니 하늘이 파랗다느니 그리고 오늘은 가을비가 내린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이 가을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역에 나가 기차라도 타야 할까 보다고 말을 했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 두고서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나온 길 작은 간이역에 내려 강을 찾았다고 그렇게 짧은 안부를 보내 주었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둔채로 그렇게 떠나온 도시에서 이 강물이 그렇게 그립더니만 가을이라 쓸쓸한 노을빛 강가에 서고 보니 그리운 것은 다른 어느 것이 아닌 사람이더라고 그렇게 당신의 그리움을 전해왔습니다 끝내 사랑한다는 말은 접어두고서 그 강가 갈대숲에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았노라고 말을 했지요 사랑한다는 말은 내색도 없이 접어두고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

시, 글 2022.10.04

그리움을 말한다 / 윤보영

그리움 한 자락 담고 사는 것은 그만큼 삶이 넉넉하다는 뜻이다 그립거든 그리운대로 받아 들이자 마주 보고 있는 산도 그리울 때는 나뭇잎을 날려 그립다 말을 하고 하늘도 그리우면 비를 쏟는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할 사람이다 그립거든 그리운 대로 그리워하고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받아들이자 가슴에 담긴 그리움도 아픔이 만든 사랑이다 가슴에 담고 있는 그리움을 지우려 하지말자 지운만큼 지워진 상처가 살아나고 상처에는 아픈 바람만 더 아프게 분다 그리울 때는 무얼 해도 그리울 때는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그리워하자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 맛을 느낄 수 있게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그리워하자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고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다

시, 글 2022.10.04

나이 들어 간다는 건 / 자향

나이가 들어 간다는 건 세상과 조금씩 멀어져 가는 일이다 자위적인 결핍에 의해 체념을 배워가며 삶이 부여받은 의미로부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는 일이다 별 것도 아닌 일로 감성에 젖어 눈물 흘리기도 하고 이름없는 풀꽃을 보며 동질감에 허한 마음을 나눌 때도 있다 정의의 화신처럼 내달리기도 하고 부당한 울분에 함께 분노 하기도 한다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관조의 속 깊은 혜량이 가져다 준 선물로 받아들이며 감사한다 내가 가본 길 만큼만 내가 아는 길이듯 아는 길 밖으론 나가려 하지 않는다 양손에 움켜쥔 모래알이 스스로 빠져나간 주먹을 털듯 집착을 털어가며 빽빽하게 밀집된 욕망의 가시나무를 하나 하나 베어 나가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곧게 뻗은 길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이 하늘과 맞닿은 길 ..

시, 글 2022.08.18

푸른 밤 / 나희덕

너에게도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시, 글 2022.07.27

7월의 기도 / 윤보영

7월에는 행복하게 해 주소서 그저 남들처럼 웃을 때 웃을 수 있고 고마울 때 고마운 마음을 느낄 수 있게 내 편 되는 7월이 되게 해 주소서 3월에 핀 강한 꽃은 지고 없고 5월의 진한 사랑과 6월의 용기있는 인내는 부족하더라도 7월에는 ,내 7월에는 남들처럼 어울림이 있게 해 주소서 생각보다 먼저 나오는 말 보다는 가슴에서 느끼는 사랑으로 어울림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소서 내가 행복한만큼 행복을 나누어 보내는 통 큰 7월이 되게 해 주소서

시, 글 2022.07.17

흐린 날이 난 좋다 / 공석진

옛 사랑이 생각나서 좋고 외로움이 위로 받아서 좋고 목마른 세상 폭우의 반전을 기다리는 바람이 난 좋다 분위기에 취해서 좋고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고 가뜩이나 메마른 세상 눅눅한 여유로움이 난 좋다 치열한 세상살이 여유를 갖게 해서 좋고 가난한 자 마음 한 켠 카타르시스가 좋다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외로워하며 누군가에 기대어 쉴 수 있는 빈 공간을 제공해 줘서 흐린 날이 난 좋다

시, 글 2022.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