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27

무심천 / 도종환

한 세상 사는 동안 가장 버리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욕심이라서 인연이라서 그 끈 떨쳐버릴 수 없어 괴로울 때 이 물의 끝까지 함께 따라가 보시게 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 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 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 물 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 이 세상 사는 동안엔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어긋나고 어긋나는 사랑의 매듭 다 풀어 물살에 주고 달맞이꽃 속에 서서 흔들리다 돌아보시게 돌아서는 텅 빈 가슴으로 바람 한 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 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무심히 흘러 오고 흘러 갔는지 알게 될지니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욕심을 다 버린 뒤 저녁 하늘처럼 넓어진 마음 무심이라 하나니 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무심..

시, 글 2025.05.29

삶의 의미를 묻는 그대에게 / 류시화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시, 글 2025.05.18

마음길 / 김재진

마음에도 길이 있어 아득하게 멀거나 좁을대로 좁아져 숨 가쁜 모양이다 갈 수 없는 곳과, 가고는 오지 않는 곳으로 그 길 끊어진 자리에 절벽 있어 가다 뛰어 내리고 싶을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문이 있어 열리거나 닫히거나 더러는 비틀릴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항아리 있어 그 안에 누군가를 담아두고 오래 오래 익혀 먹고 싶은 모양이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 하고 있는 저녁 일어서지 못한 몸이 따라 문밖을 나서는데 마음에도 길이 있어 나뉘는 모양이다.

시, 글 2025.05.08

세상은 삶을 담는 그릇 / 김종선

지나온 세월 원망하며 탄식 속에 시간을 낭비하고 번뇌 속에서 눈물지며 오늘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나친 과욕에 기름 뿌리고 불 붙여 화 부르는 일을 만들고 몸과 마음 혹사시켜  훗날 병들고 나약해져  가슴 도려내는 후회속에 살려하는 것은 아닌가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무엇에 쫓기며 살아왔고 무엇을 쫓으며 살고 있나 넓은 세상은 우리네 삶을 담는 그릇인 것을 무엇이 부족해 채우려만 하는가 세상이라는 그릇을 무엇으로 모두 채울 수 있단 말인가 빈곳은 빈 것으로 채워진 곳은 채워진대로 그렇게 세상이라는 그릇속에 우리네 삶을 하나 둘 담아가며 비워가며 사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시, 글 2025.03.20

흐린 날의 바다는 참 쓸쓸해 보인다 / 박성철

나는 바다에 서 있다 잡고 싶어도 잡지 못할 파도에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그를 떠나 보내며  쓸쓸한 바다에 서 있다. 서해바다에서  가끔씪은 흔들려보는 거야 흐르는 눈물을 애써 막을 필요는 없어 그냥 내 슬픔을 보여주는 거야 자신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어 물이 고이면 썩어들어가는 것처럼 작은 상심이 절망이 될 때까지 쌓아둘 필요는 없어 상심이 커져가 그것이 넘쳐날 땐  스스로 비울 수 있는 힘도 필요한 거야 삶이 흔들리는 건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다는 건 내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증거니까 가끔씩은 흔들려보는 거야 하지만 허물어지면 안 돼 지금 내게 기쁨이 없다고  모든 걸 포기할 필요는 없어 늦게 찾아온 기쁨은 그만큼 늦게 떠나가니까.

시, 글 2025.02.19

한번은 시처럼 살아야한다 / 양광모

나는 몰랐다. 인생이라는 나무에는 슬픔도 한 송이 꽃이라는 것을 자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펄럭이는 날개가 아니라  펄떡이는 심장이라는 것을 진정한 비상이란 대지가 아니라  나를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인생에는 창공을 날아오르는 모험보다 절벽을 뛰어내려야 하는 모험이 더 많다는 것을 절망이란 불청객과 같지만 희망이란 초대를 받야야만 찾아오는 손님과 같다는 것을 12월에는 봄을 기다리지 말고 힘껏 겨울을 이겨내려 애써야 한다는 것을 친구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도와줘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떤 사랑은 이별로 끝나지만 어떤 사랑은 이별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시간은 멈출 수 없지만 시계는 잠시 꺼 둘 수 있다는 것을 성공이란 ..

시, 글 2025.02.15

기다리는 사람 / 김재진

기다리는 사람 / 김재진설령 네가 오지 않는다 해도  기다림 하나로 만족할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묵묵히 쳐다보며 마음 속에 넣어둔 네 웃는 얼굴 거울처럼 한 번씩 비춰볼 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함께 있던 저무는 해를 눈 속에 가득히 담아둘 수 있다. 세상에 와서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것 알고 보면 기다림이다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다 기다리는 동안 따뜻했던 내 마음을 너에게 주고 싶다 내 마음 가져간 네 마음을 눈 녹듯 따뜻하게 녹여주고 싶다 삶에 지친 네 시린 손 잡아주고 싶다 쉬고 싶을 때 언제라도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기다림으로 네 곁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다.

시, 글 2025.02.09

살다가 / 최유진

살다가 / 최유진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거든 누구를 탓하지 말거라 이미 생긴 일이거늘 어찌하겠느냐 살다가 울 일이 생기거든 누구를 원망 말고 실컷 울어보렴 울고 나면 속이라도 시원하지 않겠니 살다가 이별할 일이 생기거든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인연은 만났다가 헤어지기도 하는 것이란다 살다가 사랑할 일이 생기거든 밀고 당기는 시간을 줄이거라 사랑의 실타래가 항상 질기지 않으니 적당히 밀고 당기려무나 살다가 행복한 일이 생기거든 너무 잡으려 애쓰지 말거라 무엇이든 잡으려 하면 달아나고 꽉 쥐고 있는다고 내 것이 아니잖아

시, 글 2025.02.04

슬픈 시 / 서정윤

슬픈 시 / 서정윤 술로써 눈물보다 아픈 가슴을 숨길 수 없을 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적는다 별을 향해 그 아래 서 있기가 그리 부끄러울 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읽는다 그냥 손을 놓으면 그만인 것을 아직 '나' 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쓰러진 뒷모습을 생각잖고  한쪽 발을 건너 디디면 될 것을 뭔가 잃어버릴 것 같은 허전함에 우리는 붙들려 있다 어디엔들 슬프지 않은 사람이 없으랴만은 하늘이 아파 눈물이 날 때 눈물로도 숨길 수 없어 술을 마실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가 되어 누구에겐가 읽히고 있다.

시, 글 2025.02.03

정작 외로운 사람은 말이 없고 / 권경인

정작 외로운 사람은 말이 없고 / 권경인  더이상 펼쳐지지 않는 우산을  버리지 못하는 건 추억때문이다. 큰 걸음으로 온 사람 큰 자취 남기고 급한 걸음으로 왔던 사람 급히 떠나는 법 높은 새의 둥지에도  길을 여는 슬픔도 지치면  무슨 넋이 되는가 나무여,  그 우울한 도취여 삶에서 온전한 건 죽음뿐이니 우리는 항상 뒤늦게야 깨닫는다 잃을 것 다 잃고 난  마음의 이 고요한 평화 세상을 다 채우고도  자취를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외로움은 오히려 극한을 견디어낼 힘이 되는가 정작 외로운 사람은 말이 없고 죽은 세포는 가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시, 글 2025.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