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16

세월은 흐르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 김선희

지쳐도 힘겨워도 세월 가는 소리는 벌써 저무는 해이다 웃을 일이 별로 없어도 찡그린 얼굴들이 많이 그려진 사회 속에서도 세월은 흐르고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점 더 웃기 위해 좀 더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하루의 시간을 써야지 웃는 얼굴 고운 마음 키우기 위해 오늘도 보내야지 세월은 이 순간에도 흐르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시, 글 2021.12.28

겨울밤 / 박후식

빈 뜰을 사색하는 나무 위에 나의 등불 위에 어둠을 쪼으며 눈이 내린다 겨울 가지에 아득히 불을 밝히는 밤의 눈발 그 눈발에 섞이어 나의 등불은 밤을 떠난다 무수한 밤의 낙서들이 나의 편린들이 불 꺼진 뜨락에 울고 있다 밤 새운 밤의 눈들이 가슴 찍힌 내 아낙들이 까만 선창에 끌려와 있다 뱃전에 부딫는 파란 물빛과 달빛에 빛나는 바다 먼 비둘기의 발목 그 슬픈 항로를 나는 끝내 버리지 못한다 하현 새벽달이 바다의 옆구리에 떨어진다 머리 빗은 아낙들은 타버린 수평 끝에 울고 있다 밤은 나의 갱도에서 수심 깊은 항해를 계속하고 아, 어디선가 얼음 깨는 소리 갱을 깨는 소리 꽃들은 소리하고 있다 눈이 내린다 빈 뜰을 사색하는 나무 위에 나의 등불 위에

시, 글 2021.12.26

그대 너무도 그리운 날에 / 도지현

오늘도 그 오솔길을 걷습니다 곁에 그대의 체취를 느끼며 같이 보던 자그마한 들꽃을 보며 들꽃도 참 예쁘다 했지요 바람이 불어오면 나뭇잎 소리 그 소리를 같이 들으며 가슴이 너무도 벅찬 그대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며 바람 소리에 휩쓸렸죠 비가 오는 날이면 비를 맞으며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모습을 서로가 바라보며 얼마나 웃었던지요 지금도 그 생각에 저린 가슴입니다 다시는 그런 시절이 있을 수 없는 이 세상을 살기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잔다는 것에 많은 비애를 느끼며 하루빨리 저 하늘의 별이 되어 그대의 별 옆에서 나도 별이 될래요

시, 글 2021.12.22

12월을 보내며 / 안국훈

마지막이라 말하기도 아까운 게 시간이다 남은 세월이 짧을수록 더 소중하다 차곡차곡 쌓인 세월이 나무에게는 나이테가 되지만 인간에게는 추억이 된다 한 해를 보내려니 후회가 앞서지만 희망찬 새해를 맞노라니 가슴이 설렌다 12월이 다 가기 전에 그리운 사람에게 안부 전하고 보고 싶은 이 찾아가 차 한 잔 나누어라 사랑을 놓치면 눈물이지만 찾아가면 기쁨이 된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만남을 행운이라 부른다 삶이 소중하다고 너무 조급하게 다그치지 말라 아무리 애쓰지 않아도 인생은 채워지기 마련이다 어찌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물을 너무 주어 시드는 난초를 보라 부족하면 갈증이지만 넘치면 욕망 속에 빠져 절망의 늪에 허우적대며 가쁜 숨 쉴 때 있다 바위가 이끼 떄문에 뒤척인 적 있던가 지나가던 멋진 총각을 바라보는 처녀..

시, 글 2021.12.21

구절초꽃 / 김용택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 그늘을 따라서 걷다 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 오는 강 기슭에는 구절초꽃 새 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산 너머 그 너머 검은 산 너머 서늘한 저녁달만 떠오릅니다 구절초꽃 새 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듭니다.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

시, 글 2021.12.20

흐린날이 난 좋다 / 공석진

흐린 날이 좋다 옛 사랑이 생각나서 좋고 외로움이 위로 받아서 좋고 목마른 세상, 폭우의 반전을 기다리는 바람이 좋다 분위기에 취해서 좋고 눈이 부시지 않아서 좋고 가뜩이나 메마른 세상 눅눅한 여유로움이 난 좋다 치열한 세상살이 여유를 갖게 해서 좋고 가난한 자 마음 한 켠 카타르시스가 좋다 그리움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외로워하며 누군가에 기대어 쉴 수 있는 빈 공간을 제공해줘서 흐린 날이 난 좋다

시, 글 2021.12.20

그저 그리울 뿐이다 / 김설하

돌아보면 그립지 아니한 것이 없다 온 가슴 젖어 연민어린 고독 절절한 사연을 길어 올려도 추억의 마침표를 찍어야한다 보내놓고 흘리는 눈물 따위로 애통에 겨워말자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겨두고 기약 없는 먼 추억에서 건져낼 때까지 아무런 약속도 말자 돌아보면 그립지 아니한 것이 없다 빈자리 온기 사라지고 눈물로 얼룩진 베갯잇에 추억이 누웠다 눈가 버걱거리는 소금기마저 사라진 그립다 못해 아리고 쓰리면 잠 못 이루는 시간이 아프다 그리움은 그저 그리움으로 떠나보내자 언젠가 꺼내든 가슴속 엽서 한장 부치지 못한 사연하나 오롯이 남겨진 그저 그리울 뿐이다

시, 글 2021.12.18

사랑은 보내는 자의 것 / 이정하

미리 아파하지 마라 미리 아파한다고 해서 정작 그 순간이 덜 아픈 것은 아니다. 그대 떠난다고 해서 내내 베갯잇에 얼굴을 묻고만 있지 마라 퍼낼수록 더욱 고여드는 것이 아픔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현관문을 나서 가까운 교회라도 찾자 그대, 혹은 나를 위해 두 손 모으는 그 순간 사랑은 보내는 자의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미리 아파하지 마라 그립다고 해서 멍하니 서 있지마라.

시, 글 2021.12.17

12월의 달력을 바라보며 / 이인자

한 해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11월 달력을 넘겼다 그러고 보니 달랑 남은 한 장의 달력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한 해를 보냈던가? 돌아보니 뽀오얗게 내리는 눈발에 하얗게 덮혀버린 들판처럼 모두가 파묻혀 아무 색깔 찾을 길 없다 기쁘고 즐거워 가슴이 따뜻해졌던 붉은 색깔이 있었고 외롭고 허전함에 파아랗게 질린 형광색도 있었으며 때로는 저무는 인생에서 낭만을 음미하며 포근함과 행복을 주는 환희의 황금빛도 있었으련만 이제 돌아보니 모두가 한 가지 색이었음은... 아무리 헤쳐 보려 해도 모두가 하아얗게 덮혀 버린 들판처럼 뽀오얗게 묻혀 버린 지난 날은 무지개 색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는 채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시, 글 2021.12.16

먼 길에서 띄운 배 / 박남준

부는 바람처럼 길을 떠났습니다 갈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가 닿을 수 없는 사랑 때문도 더욱 아닙니다 그 길의 길목에서 이런저런 만남의 인연들 맺었습니다 산 넘고 들을 지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 끝에서 발길 돌리며 눈시울 붉히던 낮밤이 있었습니다 그 길가에 하얀 눈 나리고 궂은비 뿌렸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 갈 곳 없이 떠도는 막막한 일이 되었습니다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오래도록 그 강가에 머물렀습니다 이 강도 바다로 이어지겠지요 강물로 흐를 수 없는지 그 강엔 자욱이 물안개 일었습니다 이제 닻을 풀겠어요 어디 둘 길 없는 마음으로 빈 배 하나 띄웠어요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의 큰 병 떠날 리야 있겠어요 제 마음 실어 띄울 수 없었어요 민들레 꽃씨처럼 풀풀이 흩어져 띄워 보낼 마음 하나 남아 있지 않..

시, 글 2021.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