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 박라연

Daisyhg 2012. 2. 23. 16:59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 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 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