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가는 길 / 도종환
잠시 고여있다 가게
나고 이우는 한평생 흔들리다 갔어도
저무는 강 풀잎처럼 흔들리다 갔어도
바람의 꺼풀 벗겨 풀잎이 만든 이슬처럼
어디 한 곳쯤은 고여 있다 가게
귀 기울였다 가게
이 넓은 세상 뿌리 내리진 못했어도
씨앗 하나 이 땅 위에 쓸쓸히 떨어지는 소리
한 번쯤 듣다가도 가게
조금은 가파른 상공을 스쳐가고만 우리들
아늑한 뜨락을 만날 순 없었어도
끝없는 벌판이 되어 흩어지고만 우리들
아늑한 잠자리 하나 만들 순 없었어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가게
버들 뜬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고 가게
끓어오르던 온 몸의 피 바람에 삭이다
낮은 하늘에서도 살얼음 어는 소리 들리고
하늘 가는 먼 길 중에
몸도 뜻도 둘 곳이 없어지면
빗방울로 한 번쯤 더 떨어지다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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