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16

약속 / 김남조

어수룩하고 때로는 밑져 손해만 보는 성싶은 이대로 우리는 한 평생 바보처럼 살아버리고 말자 우리들 그 첫 날에 만남에 바치는 고마움을 잊은 적 없이 살자 철따라 별들이 그 자리를 옮겨 앉아도 매양 우리는 한 자리에 살자 가을이면 낙엽을 쓸고, 겨울이면 불을 지피는 자리에 앉아 눈짓을 보내며 웃고 살자 다른 사람의 행보같은 것 자존심 같은 것 조금도 멍 들이지 말고 우리 둘이만 못난이처럼 살자.

시, 글 2021.11.17

끝이 없는 길 / 박인희

길가의 가로수 옷을 벗으면 떨어지는 잎새 위에 어리는 얼굴 그 모습 보려고 가까이 가면 나를 두고 저만큼 또 멀어지네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계절이 다 가도록 걸어가는 길 잊혀진 얼굴이 되살아나는 저만큼의 거리는 얼마쯤일까 바람이 불어와 볼에 스치면 다시 한번 그 시절로 가고 싶어라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계절이 다 가도록 걸어가는 길 걸어가는 길

시, 글 2021.11.15

바다와 바람의 연가 / 손은교

사랑을 하면 누군들 서성이지 않으랴 바다는 바람을 만들고 바람은 파도를 만들어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서로의 가슴속에는 늘상 파란눈이 박혀있다 저 , 신기루처럼 연연히 작은 깃발들로 나부끼는 하얀 그리움 건너 선연한 눈망울 간절히 출렁이며 이따금 영혼의 뜨락으로 내려앉는 푸른 귀 적시는 하늘 꽃 피는 소리 풀잎 같은 눈이 닻을 내리면 그대의 노래는 오랜 깊은 뒤에야 깨어나는 것을 아프지 않고서 어찌 꽃이 되며 눈물 없는 사랑 어디에 있으랴 갈대 지붕 여미는 안쓰런 억새밭에 바다는 그저, 흔들리는 바람으로 서성이며 펄럭이며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바람과 닮은 바다 서로가 멀리서 아주 멀리서 그대들은 소리 없는 꽃이 되고 싶었네 푸른 꽃이 되고 싶었네 지금은 모두가 어디만큼 가고 있는가

시, 글 2021.11.15

커피 향으로 행복한 아침 / 오광수

원두 커피의 향이 천천히 방안에 내려앉는 아침은 평안한 마음이어서 좋습니다. 헤이즐넛의 오묘함과 맛있는 불루마운틴의 조화로운 향기는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마저 감동시키고 가끔씩 호흡을 쉬어 긴장케 하는 커피메이트의 맥박 소리는 기다림을 설렘으로 유도합니다 핸드밀로 가루를 더 곱게 만듦은 커피를 쓰고 떫게 만들어 마실 때 나의 욕심과 교만을 깨닫기 위함인데, 한 모금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면 커피 향의 살가운 속삭임이 호흡으로 전해져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이 행복함. 아! 어떻게 미운 마음을 가질 수 있으랴? 따스함과 함께 온 쓴맛이 나중에 내겐 단맛인 것을, 커피 향기가 입안에서 긴 여운으로 남아 있는 이 아침은 어제는 어려웠지만 내일은 반드시 좋은 날이 오는 행복한 오늘의 시작입니다.

시, 글 2021.11.12

내 떠난 자리에 / 강숙려

내 것이라 탐하지 말자 어차피 길은 하나요 손은 빈손이라 그 날의 것으로 기쁨되는 나를 아는 모든 자에게 돌려주자 사랑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자 내 것이라 아끼며 싸맸던 오직 한 사람 그도 갔는데, 뒤돌아 보지 않고 허위허위 가고 말던데 무엇을 내 것이라 미련을 두리요 가는 것은 가고 오는 것은 거두어 들여 사랑하고 사랑주며 애틋이 살다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꺠끗하게 정돈하고 살아가야지 내 떠난 자리에 한 그루 향기로운 꽃이라도 피어날 수 있다면 그냥 감사할 따름입니다

시, 글 2021.11.12

추풍의 노래 / 조선윤

저무는 창가에 기대서서 흐르는 계절을 보노라면 푸름을 자랑하던 잎 벌써 낙엽으로 지고 산봉우리 앙상한 가지가 드러났다 눈에 익은 풍경 바뀌어 가고 잿빛 하늘 아래 먹구름 마음에 공허를 불러오고 밖에는 스산한 바람 부는데 빈 둥지 홀로 남은 어미 새처럼 상실감에 존재를 알고 언제나 같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투명한 유리창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이 상반된 고요는 어제와 다른 느낌으로 앞으로 펼쳐질 하얀 세상 그리며 새로운 정체성을 시험해본다 인생의 어디쯤인가 내 창을 두들기는 황혼 하루가 천금같이 소중한 지금 오늘도 찬란하게 펼치자 한결 아름다운 내일이 오기를 기도로 부르는 추풍의 노래여!

시, 글 2021.11.10

초겨울 저녁 / 강현옥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유리창엔 하얀 성애가 탈출하지 못한 추억을 슬금슬금 그리고 있다 지난 세월 흐른 내 눈물방울 세는 동안 구름은 떠돌다 늙은 감나무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고 별빛은 어둠 속에 몸 담그고 눈 깜박깜박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침 햇살 속 국화는 무덤 가에서 한 올 한 올 세상을 지운다 낮은 동산에 아늑히 감싸 안긴 시골마을 모퉁이를 돌아서 멀지 않는 기억 속을 걷는다 내 어린 날의 배나무 사이로 뭉개 뭉개 피어오르는 추억의 돌담에 걸터앉으면 버들피리 소리 들리고 마른 풀잎들은 아침 서리를 털며 부질없는 바람에 흐느끼고 있다

시, 글 2021.11.10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숴진다 그러면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떄는 고립을 피해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

시, 글 2021.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