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16

블랙커피가 그리운 새벽에 / 정미숙

문득 블랙커피가 그리운 새벽이다 밤새 쌓아 올린 그리움의 탑을 허물어 커피를 만들면 허무로 쏟아져 부서질 사연들 어제 만나고 어제 헤어졌던 사람과 사람들 그 틈새에 그리움을 쌓아 두고 가슴속에 촉촉한 이끼를 심어 두고 말았다 풀 향기 날리며 머물렀던 순간들은 한줄기 소낙비를 퍼붓고 멈춘 지 오래 대지엔 갈증으로 불타는 영혼들이 도시를 뜀뛰기 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저마다 생활전선에 불꽃 하나씩을 피우려 한다 내일을 향한 디딤돌 위에 서서 잠시 그렇게 블랙커피를 마시며 우중충한 도시의 회색 벽에 붓을 들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먼동이 터오는 산간 마을을 그리워하며 마음 밭에 촉촉한 이슬이 쉬어 가길 바란다 블랙커피가 오늘처럼 그리운 새벽은 사람 냄새 가득 피어나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그리운 날이다 사람..

시, 글 2021.12.10

어쩌다 시인이 되어 / 이기철

내 어쩌다 시인이 되어 이 세상길 혼자 걸어가네 내 가진 것 시인이라는 이름밖엔 아무것도 없어도 내 하늘과 땅, 구름과 시내 가진 것만으로도 넉넉한 마음이 되어 혼자라도 여럿인 듯 부유한 마음으로 이 세상 길 걸어가네 어쩌다 떨어지는 나뭇잎 발길에라도 스치면 그것만으로도 기쁨이라 여기며 냇물이 전하는 마음 알아들을 수 있으면 더없는 은총이라 생각하며 잠시라도 꽃의 마음, 나무의 마음에 가까이 가리라 나를 채찍질 하며 남들은 가위 들어 마음의 가지를 잘라낸다 하지만 나는 풀싹처럼 그것들을 보듬으며 가네 내 욕망의 강철이 부드러운 새움이 될 때까지 나는 내 체온으로 그것들을 다듬고 데우며 가네 내 어쩌다 시인이 되어 사람과 짐승, 나무와 풀들에 눈맞추며 맨발이라도 아프지 않게 이 세상길 혼자 걸어가네

시, 글 2021.12.09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백창우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 갈 수는 없지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푸른 하늘 열릴 날이 있을 거야 고운 아침 맞을 날이 있을 거야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 다고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 울릴테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 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인 걸.

시, 글 2021.12.07

겨울이 오기 전에 / 백창우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몇장의 편지를 쓰자 찬물에 머리를 감고 겨울을 나는 법을 이야기 하자 가난한 시인의 새벽 노래 하나쯤 떠올리고 눅눅한 가슴에 꽃씨를 심자 우린 너무 '나쁜 습관' 처럼 살아왔어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길은 끝나지 않는데 늘 채워두는 것만큼 불쌍한 일이 어디있어 이제 숨을 좀 돌리고 다시 생각해보자 큰 것만을 그리노라 소중한 작은 것들을 잃어온 건 아닌지 길은 길과 이어져 서로 만나고 작은 것들의 바로 곁에 큰 것이 서 있는데 우린 바보같이 먼 데만 바라봤어 사람 하나를 만나는 일이 온 세상을 만나는 일인데 조그만 나무 하나가 온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데 우린 참 멍청했어 술잔에 흐르는 맑은 도랑에 대해 왜 이젠 아무도 말하지 않는거지 뭐 마주앉을 시간마저 없었는걸 그래, 오늘은 우리 ..

시, 글 2021.12.01

귀가 / 도종환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

시, 글 2021.11.29

억새숲에서 / 조선윤

아름다움으로 가는 시간 사랑이 머무는 하늘가에 억새숲을 걷노라니 가는 계절이 아쉬워 찬 기운이 묻어나는 하늘 향해 흔드는 야윈 손이 애처롭다 가만히 노저어 가는 마음 스쳐 밀려오는 그리움 행여 맑은 소리 밟으며 올 것 같아 아늑한 노을빛 은빛 억새 푸른 창공 향하여 나는 고운 햇살 그리움으로 손짓하는 파도가 된다 아름다운 사랑도 언젠가는 때가 되면 저무는 것을 괜스레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세월이 가고 있음인가 가을은 조용히 흔들린다 억새도, 내 마음도 흔들린다

시, 글 2021.11.29

겨울 그 찻집 / 송상익

첫눈 내리던 날 팔공산 한티재 가는 길 절집에 대웅전처럼 커다란 찻집이 있다 청사초롱 불 밝힌 커다란 팔각 완자 문을 빼꼼히 열어젖히면 삐걱거리는 소리에 진한 촛농 내음이 반긴다 하얀 김 피어오르는 백 년 차 한 잔에 창밖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젊은 날의 추억을 마신다 사각의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팽팽히 밀고 당기며 넘나들던 시선 둘만이 아는 그 길을 겨울날 펄럭이는 머플러처럼 타박타박 걸어갔었다 촛농을 굴리던 대화는 불타듯 흩어지고 녹아내리는 촛농은 식어버린 육신처럼 심지만 홀로 태운다 촛농으로 뭉쳐진 덩어리는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슬픔을 노래한다 날아오르는 새 떼들처럼 연인들은 날아들고 나는 목마른 영혼으로 살아있는 겨울 그 찻집 한 바퀴 돌아 나온다.

시, 글 2021.11.25

눈 / 김효근

조그만 산 길에 흰 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욱을 영원히 남기고 싶소 내 작은 마음이 하얗게 물들 때까지 새하얀 산길을 헤매이고 싶소 외로운 겨울새 소리 멀리서 들려오면 내 공상에 파문이 일어 갈길을 잊어버리오 가슴에 새겨보리라 순결한 님의 목소리 바람결에 실려 오는가 흰 눈 되어 온다오 저 멀리 숲사이로 내마음 달려가나 아 겨울새 보이지 않고 흰 여운만 남아 있다오 눈 감고 들어보리라 끝없는 님의 노래여 나 어느새 흰눈되어 산길을 걸어 간다오

시, 글 2021.11.24

삶에 있어서 조용함에 관하여 / 황인철

그대 살다가 나의 이름을 잊어버린다 하여도 그대 떠난 그 자리에 그대가 남기고 간 바람 속에 서서 오랫동안 그대의 이름을 불러주리라 그리고도 그대가 피운 꽃이 시들지 않고 그대 가슴에 별이 뜨는 강물이 마르지 않을 때 나는 그제서야 내 쓸쓸한 뒷모습을 보여주겠다 비가 오고 혹은 눈이 오는 날 어쩌다 그대의 사랑이 그대를 모른다 하여 그대의 가슴 속에 빈 집만이 남아 차가운 바람이 불고 창문이 흔들리는 외로움에 못 견디어 그대가 돌아온다면 그대가 나에게로 온 그 자리에 나는 가고 없어도 내 사랑의 그리움은 고스란히 남아 그대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으리라 그때 그대는 기억하리라 그대가 잊어버린 나의 이름을, 그리고 그대가 남기고 간 바람이 내 삶의 겹겹에 쓰러진 흔적으로 남아 있음을 알게 되리라

시, 글 2021.11.24

중년의 겨울 밤 / 이채

꽃 지고 낙엽도 진 빈터에 초대하지 않은 썰렁한 바람이 지나면 깊은 밤 비집고 소리없이 들어서는 가슴 후비는 쓸쓸함에 중년의 겨울밤은 외롭기만 합니다 바람 앞에 등잔 같은 아련한 그리움 앙상한 가지에 눈꽃으로 피고 달빛 젖어 더 하얀 눈꽃이 바람에 날리어 가슴까지 덮어도 저린 그리움 가눌 길 없습니다 옷고름 풀지 못한 사랑 또다시 그리워져도 한낱 눈물 속에 흐르다 말 겨울 강에 비치는 초승달 같은 사람이여! 꿈에라도 나룻배 되어 당신을 싣고 차가운 강을 건너는 중년의 겨울밤 여름 하늘을 덮고 잠을 청한대도 춥기만 한데 차라리 눈을 감고 꿈에라도 시린 가슴 녹이고 싶은 중년의 겨울밤은 잠들지 않습니다

시, 글 20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