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23

가을 노래 / 이해인

하늘은 높아 가고 마음은 깊어가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를 키워 행복한 나무여, 바람이여, 슬프지 않아도 안으로 고여 오는 눈물은 그리움 때문인가 가을이 오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멀리 있는 친구가 보고 싶고 죄없이 눈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고 싶네 친구여, 너와 나의 사이에도 말보다는 소리 없이 강이 흐르네 이제는 우리 더욱 고독해져야겠구나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겠구나 잎이 질 때마다 한 웅큼의 시들을 쏟아 내는 나무여, 바람이여,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 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 하늘은 높아 가고 기도는 깊어 가네

시, 글 2021.08.26

추억 소환 / 이 채

인생 칠십이면 가히 무심 이로다. 흐르는 물은 내 세월 같고, 부는 바람은 내 마음 같고, 저무는 해는 내 모습 같으니~~ 어찌 늙어보지 않고 늙음을 말하는가. 육신이 칠십이면 무엇인들 성하리오? 둥근 돌이 우연 일 리 없고 오랜 나무가 공연할 리 없고 지는 낙엽이 온전할 리 없으니 어찌 늙어 보지 않고 삶을 논하는가. 인생 칠십이면 가히 천심이로다. 세상사 모질고 인생사 거칠어도 내 품안에 떠 가는 구름들아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탐 하리오. 한 세상! 왔다 가는 나그네여 --- 가져 갈수 없는 짐에 미련을 두지 마오.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떠나가는 인생 무겁기도 하건만 그대는 무엇이 아까워 힘겹게 이고 지고 안고 사시나요? 빈손으로 왔으면 빈손으로 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 이거늘 무슨 염치로 세상 ..

시, 글 2021.08.25

어느 날의 커피 / 이해인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 했는데 이런 날 이런 마음을 들어 줄 사람을 생각하니 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읽어 내려가 보아도 모두가 아니었다 혼자 바람 맞고 사는 세상 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이고 마시는 뜨거운 한잔의 커피 아! 삶이란 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시, 글 2021.08.24

그대 , 강물처럼 흘러가라 / 유인숙

그대, 강물처럼 흘러가라 거치는 돌 뿌리 깊게 박혀 발목을 붙들어도 가다 멈추지 말고 고요히 흐르거라 흐르고 또 흘러서 내 그리움의 강가에 이르거든 잠시 사랑의 몸짓으로 애틋하게 뒤척이다 이내 큰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라 고여 있는 것에는 순식간, 탁한 빛 감돌고 올무 감긴 물풀 어둡게 돋아나느니 내 삶의 날들이여, 푸른 그리움이여, 세상사 돋친 가시에 마음 다쳐 귀 먹고 눈 멀어 그 자리 주저않고 싶을지라도 소망의 소리에 다시 귀 기울이며 말없이 흐르거라 울음초차 삼키는 속 깊은 강물처럼 그렇게 유유히 흘러가라.

시, 글 2021.08.23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면 / 정미숙

우연히 창 밖을 보다가 그리움의 창을 열고 문득 꺼내보고 싶은 이름이 있지요 소중하게 간직하고픈 추억 앨범처럼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된 편지 한 통에 가슴이 멍해지는 그런 사람도 있고 짧은 엽서 한 통에 가슴 떨리는 이름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꼭 한번은 만나고픈 사람도 있더이다 살아가는 날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로 물러나고 싶은 사람이 선을 긋지 않아도 생기더이다 슬픈 일이지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사람만 많았으면 좋겠는데 살다 보니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더이다 다 내 마음 같지 않아서라고 돌리기에는 슬픈 일이지요 한 발자국 다가서는 일이 무에 그리 어렵다고 뒤로 물러나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사 모두가 힘들다 하는데..

시, 글 2021.08.22

가을비를 맞으며 / 용혜원

촉촉히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얼마만큼의 삶을 내 가슴에 적셔왔는가 생각해 본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인가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허전한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훌쩍 떠날 날이 오면 미련없이 떠나버려도 좋을 만큼 살아왔는가 봄비는 가을을 위하여 있다지만 가을비는 무엇을 위하여 있는 것일까 싸늘한 감촉이 인생의 끝에서 서성이는 자들에게 가라는 신호인 듯 한데 온몸을 적실 만큼 가을비를 맞으면 그 때는 무슨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내일을 가야 하는가

시, 글 2021.08.21

내 사람이여 / 백창우

내가 너의 어둠을 밝혀줄 수 있다면 빛 하나 가진 작은 별이 되어도 좋겠네 너 가는 곳마다 함께 다니며 너의 길을 비추겟네 내가 너의 아픔을 만져줄 수 있다면 이름 없는 들의 꽃이 되어도 좋겠네 음, 눈물이 고인 너의 눈 속에 슬픈 춤으로 흔들리겠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 가난한 살과 영혼을 모두 주고 싶네 내가 너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노래 고운 한 마리 새가 되어도 좋겟네 너의 새벽을 날아 다니며 내 가진 시를 들려 주겠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토록 더운 사랑 하나로 내 가슴에 묻히고 싶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내 삶의 끝자리를 지키고 싶네 내 사람이여 내 사람이여 너무 멀리 서 있는 내 사람이여 내 사람이여 니 사람이여 너무 멀리 서 있는 내 사람이여

시, 글 2021.08.20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 류시화

​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 두리번거리는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 그 긴 벤치에 그대로였다. ​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시, 글 2021.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