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16

가을 이야기 / 조민희

시월은 한잔의 커피향에도 그리움이 가슴으로 내려와 붉은 가을이 된다 아름답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황금 빛 노을 지듯 떠나야하는 가을과 이야길 한다 잔잔히 흐르는 솔 바람에도 힘없이 손을 떨구는 마른 잎새에서 우리들의 삶을 읽는다 이 가을 이별을 아쉬워하는 풀 벌레들의 이야기가 요란하다 지나간 시간의 자욱을 모두 지고 떠나는 갈 바람의 슬픈 노래를 듣는다 잔 바람에도 눈물 떨구듯 떨어져 이리 저리 갈 곳 잃은 그리움의 방황이다 마른 가지에 걸린 그리움은 눈물이 되고 비가 되어 가을을 적신다

시, 글 2021.10.14

바다로 달려가는 바람처럼 / 이해인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달려오는가 함께 있을 땐 잊고 있다가도 멀리 떠나고 나면 다시 그리워지는 바람 ​ 처음 듣는 황홀한 음악처럼 나뭇잎을 스쳐가다 내 작은방 유리창을 두드리는 서늘한 눈매의 바람 ​ 여름 내내 끊어오르던 내 마음을 식히며 이제 바람은 흰옷 입고 문을 여는 내게 박하 내음 가득한 언어를 풀어내려 하네 ​ 나의 약점까지도 이해하는 오래된 친구처럼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더 넓어지라고 하네 ​ 사소한 일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바다로 달려가는 바람처럼 더 맑게, 더 크게 웃으라고 하네

시, 글 2021.10.13

가을 바람 부는 날 / 윤인환

추적이던 가을비 그치고 철없던 추억인 듯 낙엽들 떼구르르 뒹구는 날 휭한 쓸쓸함을 견딜 수 없어 안부의 문자를 띄우고 전화를 해도 떨리는 건 내 손끝 뿐 당신은 묵묵부답이더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나요? 질긴 삶의 벼랑 끝에서 나처럼 찬바람과 맞서고 계신가요 아니면 사각 벽에 갇혀 곤한 잠이라도 청하고 계신건가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고혹한 물매화 꽃잎인 듯 긴 여행이라도 떠난건가요 오늘처럼 포도를 쓸고 가는 성성한 바람 부는 날 갈잎의 떨림으로 몸부림을 쳐 봅니다 촉촉한 대지에 선을 그어 봅니다 잊혀질 수 없는 당신을 그립니다 푸른 허공 끝 하얀 구름으로 피어오르는 당신 당신을 불러 봅니다 아! 울담의 모과는 이 밤도 농익어 가는데 당신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 있는건가요 시방, 내가 밟고 서 있는 ..

시, 글 2021.10.12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 / 유안진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고 비로소 가만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황금저택에 명예의 꽃다발로 둘러 싸여야만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길지도 짧지도 않았으나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주는 사람과 얘깃거리도 있었노라고 작아서 시시하나 안 잊히는 사건들도 이제 돌아보니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있었노라고 그래서 우리의 지난날들은 아름답고 아름다웠으니 앞으로도 절대로 초조하지 말며 순리로 다만 성실을 다하며 작아도 알차게 예쁘게 살면서 이 작은 가슴 가득히 영원한 느낌표를 채워 가자고 그것들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의 추억과 재산이라고 우리만 아는 미소를 건네주고 싶습니다 미인이 못 되어도 일들을 못 했어도 출세하지 못 했어도 고루고루 갖춰놓고 살지는 못해도..

시, 글 2021.10.01

숲 속의 향연 / 정미형

숲길에 몸을 내려놓고 가장 편한 마음으로 걸어보자 다람쥐가 달려오고 새들이 포로로 날아와 날개 접고 걷자 할 거야 뭉게구름 잠시 쉬어가는 짙푸른 나무에 추억을 걸어놓고 숨은그림 찾기 놀이도 해보자 지나는 바람도 기웃거리며 손내밀 거야 나무 사이 거미줄에 걸린 해맑은 시어(詩語) 하나씩 똑똑 따내서 띄어보자 하늘 품은 계곡의 심장 소리가 청아해서 좋구나 자연의 푸름이 일렁이는 사잇길의 풀들과 작은 꽃들의 노래에 흥얼거리며 느리게 또는 깡충깡충 신명 한번 나보자 작은아이로 돌아가 보는 거야 유년의 동무들이 늘 그러고 놀았듯이

시, 글 2021.09.26

이 가을에는 / 김근이

먼 산 바라보면 왜 이리 마음이 서러워 지는가 가을비에 젖은 산 들이 한 세월 화려했던 영화를 벗어 던지고 붉게 타는 석양위로 날아오른다 이 가을 이별이 남기고 간 아쉬움이 훗날 그리움으로 돌아와 내남은 인생과 동행 하겠지 하지만 가을은 그렇게 가도 다시 돌아오는 작은 희망으로 남아 어느 날 상처로 남은 이별이 우연한 해후(邂逅)로 돌아와 이 가을, 가슴에 가득히 담겨 왔으면 좋겠다

시, 글 2021.09.25

친구에게 보내는 시

네가 내가 아니듯 나 또한 네가 될 수 없기에 네 전부를 알지 못한다고 노여워하지 않기를... 단지 침묵 속에서도 어색하지 않고 마주 잡은 손짓만으로 스쳐 지나는 눈빛만으로 대화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기를.. 기쁨을 같이 나누어도 아깝지 않고 슬픔을 함께 하여도 미안하지 않으며 멀리 있다 하여도 한동안 보지 못한다 하여도 네가 나를 잊을까 걱정되지 않으며 나 또한 세월이 흐를수록 너는 더욱 또렷해져 내 마음 속에 항상 머물기를...' 어느 날 너의 단점이 발견되었다고 너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으며 네가 성인군자 같은 말만 하고 행동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늘 미소를 띄고 옳다고만 말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다만 내가 외로울 때 누군가를 원할 때 단지 혼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귀찮아하지 않고 내..

시, 글 2021.09.23

이 가을에 / 양형근

이 가을에는 젖은 음표들을 말려야지 지난여름 욕망의 이깔나무 숲을 건너오는 동안 무심코 자라난 귀를 맑게 씻어야지 노역의 상처들을 말리는 동안 아다지오의 여백 속은 참 넉넉하리라 때때로 쉼표를 찍어가며 촉촉한 노래들을 오랫동안 흥얼대리라 지상의 세간들이 따로 노래가 될 수 있다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 것인가 물빛만 출렁이는 내 발자국 길어 올리는 이 없어도 이 가을에는 당당하게 웃어야지 깊은 뿌리내림으로 당당하게 일어서야지 곱지는 않아도 넉넉한 음색으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흔들림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열꽃의 아열대 아, 그 아득함을 건널 수 있다면 이 가을에

시, 글 2021.09.16

9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9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9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

시, 글 2021.09.12

해는 기울어 서산에 지고 / 강숙려

오랜 사진첩 속의 얼굴처럼 희미해져 멀리 있다 말해도 가슴 안자락에 붙어 떠나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지 못해도 바라보지 못해도 흐르는 세월만큼 겹겹이 쌓여진 나이테처럼 문득문득 눈물겨운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왠지 그런 당신의 젖은 목소리 들려올 듯 가슴이 저려옵니다. 보고 싶다고 보고 싶었다고 금방이라도 말해 올 것만 같습니다. 그리운 만큼 자라나는 해도 기다림 만큼 웃자라다 서산으로 집니다.

시, 글 2021.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