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글 216

얼굴 / 박인희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믈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 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 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 버린 얼굴이 아닌 담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닌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시, 글 2021.11.05

11월의 기도 / 김태근

11월에는 열 장의 달력을 넘기며 살아온 날들을 다독이게 하소서 한 장 남은 12월의 달력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11월에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소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돌아보게 하소서 잘못한 것은 냉철한 모습으로 반성하게 하소서 살아오면서 잘한 것은 “참 애썼어” “참 잘했어” 칭찬의 말로 더 큰 용기를 가지게 해 주소서 못 볼 것을 보았다고 눈을 감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눈을 더 크게 뜨고 아름다운 자연풍경에 지친 눈을 머물게 하소서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고 입을 닫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입을 열고 “괜찮다 괜찮아” 긍정의 말로 꽃피게 하소서 가시 돋친 말을 들었다고 귀를 닫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조용히 귀를 열고 촛불을 밝히고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좋지 않은 기억은 지..

시, 글 2021.11.03

쉼표 / 정유찬

쉼표처럼 휴식을 주고 싶다 힘들고 지칠 때 마다 어김없이 당신 옆에 찍히는 쉼표 그 쉼표와 함께 당신이 잠시 침묵 하거나 차를 한잔 하고 호흡을 가다듬어 생기 있게 다음 줄로 넘어가면 좋겠다 다음 줄로 넘어가 내용을 만들고 지치면 또 쉬다 하루를 마감하는 당신의 일기장엔 마침표가 되어 찍히고 싶다 그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 함께 아침을 맞이하면 행복하겠다 그렇게 쉼표가 되고 마침표가 되어 살다가 우리 황혼의 끝날... 약해지고 늙어진 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는 마침표가 아닌 영원한 쉼표로 남고 싶다 사랑한다

시, 글 2021.11.02

11월의 선물 / 윤보영

사람과 사람사이에 정이 흐르는 11월입니다 가을이 봄과 여름을 데리고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고 겨울을 데리고 12월이 가까이 있다고 올해도 또 가지 끝에 남아 있다 떨어진 나무잎처럼 의미없이 지나가게 될 11월 홀로선 나무 줄기에는 이미 봄이 오고 있고 씨앗을 품고 있는 대지도 새싹 튀울 꿈에 젖어 있는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 안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제 차 한잔에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 11월 마지막 날에 내가 나에게 선물 하겠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선물 받겠습니다 ​

시, 글 2021.11.01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 글 2021.10.30

겨울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시, 글 2021.10.25

겨울 강가에서 / 우미자

이제는 마음 비우는 일 하나로 살아간다. 강물은 흐를수록 깊어지고 돌은 깎일수록 고와진다. 靑天청천의 유월 고란사 뒷그늘의 푸르던 사랑 홀로 남은 나룻배 위에 앉아 있는데 높고 낮은 가락을 고르며 뜨거운 노래로 흘러가는 강물. 거스르지 않고 順하게 흘러 바다에 닿는다. 江岸강안을 돌아가 모든 이별이 손을 잡는 生命의 合掌합장. 겨울 강을 보며 한 포기 芝蘭지란을 기르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시, 글 2021.10.24

초겨울 저녁 / 강현옥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유리창엔 하얀 성애가 탈출하지 못한 추억을 슬금슬금 그리고 있다 지난 세월 흐른 내 눈물방울 세는 동안 구름은 떠돌다 늙은 감나무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고 별빛은 어둠 속에 몸 담그고 눈 깜박깜박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침 햇살 속 국화는 무덤 가에서 한 올 한 올 세상을 지운다 낮은 동산에 아늑히 감싸 안긴 시골마을 모퉁이를 돌아서 멀지 않는 기억 속을 걷는다 내 어린 날의 배나무 사이로 뭉개 뭉개 피어오르는 추억의 돌담에 걸터앉으면 버들피리 소리 들리고 마른 풀잎들은 아침 서리를 털며 부질없는 바람에 흐느끼고 있다

시, 글 2021.10.21

겨울 연인을 위한 기도 / 이효녕

차가운 바람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 세상의 가난한 연인들을 위해 하얀 눈으로 물들여 곱게 빚은 사랑으로 여백을 채워주소서 마지막 남아 흔들리는 갈대밭마다 새들이 떠나가 빈 둥지이지만 얼지 않는 따스한 사랑 그 안에 가득 채워 모두 넉넉한 마음 안아 가난한 연인들 모두가 그 안에 편안하고 넉넉하게 들게 하소서 사랑이 따뜻한 집이게 하소서 날은 추워도 어둠 속에서 푸른 별들이 깜박이며 빛을 냅니다 별들이 있어 춥지 않은 하늘 먼 뭇별 하나 따서 모두의 가슴에 담아두고 사랑하는 사람들 꿈이게 하소서 사랑을 아름답게 빛내게 하소서 사랑하면서 그리움의 한 고비 마음마다 하얀 눈을 내려주어 눈 속에 작은 들꽃으로 피어내 눈빛보다 맑은 마음을 담아 사랑을 서로 바라보게 하소서 사랑이 행복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그리움이..

시, 글 2021.10.18

노년유정 / 정약용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 없으니 그댄 자신을 꽃으로 보시게. 털려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 들면 못 덮을 허물없으니 누군가의 눈에 들긴 힘들어도 눈 밖에 나기는 한 순간 이더이다. 귀가 얇은 자는 그 입도 가랑잎처럼 가볍고 귀가 두꺼운 자는 그 입도 바위처럼 무겁네. 사려 깊은 그대여 남의 말을 할 땐 자신의 말처럼 조심하여 해야 하리라.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너그러움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은 정은 사람을 감동케 하나니, 마음이 아름다운 그대여! 그대의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 지리라.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한 것은 필요 없는 작은 것은 보지말고 필요한 큰 것만 보라는 뜻이요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은 필요 없는 작은 말은 듣지 말..

시, 글 2021.10.15